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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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설과 정비

   1945년 해방후 신국가건설에서 올바른 교육체계의 수립은 민족진로에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인재를 육성하고 교육을 수행한다는 자연원리의 회복이고 근대 성립기에 구미열강 및 일제 그리고 그 추종세력에 의해 단절되고 파쇄된 우리 정통의 복구이며, 이 위에서 인문·사회·과학·예술 등 여러 학식부문을 확립하고 이로써 세계 제(諸)국가 속에서 주체를 정립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중등·고등교육이 이렇게 되기 위해선 이런 자세에서 학문의 내용·원리에 박식하고 아울러 도리·덕성을 겸비한 교사 곧 사범(師範)의 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압사상태에 있던 역사, 특히 국사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창설은 이 당위의 소산이었고 이런 점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정통종합대학의 출범이었다. 교수의 구성 및 학생의 자세도 그러하였다. 창설 당시 국어과·영어과·과학과·사회생활과·교육과 등이 있었고 역사과는 사회생활과 속에서 운영되었다. 사회생활과는 역사와 지리 및 공민 교사의 양성에 초점을 둔 학과였으나 교수진은 절대가 역사교수였고 학생 대다수가 역사전공이었다. 공민과는 아예 지원 학생이 없었다. 강좌도 역사학이 주이고 지리학은 부였으며 철학·윤리학·정치학·법학 등의 강의가 더하였다. 당시 역사전공 학생 수는 각 과 가운데 가장 많았다. 신국가건설기에 우리 민인들의 시대의식은 여기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사회생활과는 미군정이 점령지에서 시행하던 미국식 사회과 교육의 형식이 강제된 것으로 역사과는 낯선 제도 어색한 처지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출발은 지금까지 정통 있는 역사교육의 수행에 숱한 혼선과 장애의 기인이 되고 있다.
 
   역사교사 양성의 기형성이 해소되어야 함은 순리였다. 우리의 오랜 역사를 현양하고 전문학과로서 과학적이고 충실한 연구와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자주여론의 고조로 1950년 4월 역사과는 지리·일반사회과와 함께 독립하였고 곧 닥친 6·25전란으로 부산에 이전하였다. 그러나 1953년 휴전이 남북의 분단고착과 대립으로 이어지는 때 국립학교 설치령으로 다시 사회과로 망라, 그리고 1956년 재차 역사과로 분리, 1961년 5·16 군사정부의 사범대학 폐지시도의 파동 후 있은 학교정비기준령으로 사회생활과로 해소, 이의 폐단으로 이듬해 1962년에는 사회교육과의 명의 속에 역사전공으로서, 또다시 지리·일반사회와 병존되는 등 명칭 및 형식 소속에 번잡스런 행로를 거쳐, 1982년 다시 독립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역사교육과라 하여 내용과 폭이 작위적으로 한정됨으로써 궁색한 명칭으로 되었다.
 
   어느 처지에서도 실제 역사과의 독립성은 잃지 않았으나, 이러한 파란의 추이는 그 이유가 전문적인 우수 고급의 교사양성 대학을 우리의 전통에 입각한 사범의 기준이 아니고 학교제도로서 교육에서 파악하는, 그리하여 사범교육을 기계적인 교사양성의 과정으로만 왜소화시켜 미국식 교원의 양성방식을 사범의 대학체제에 대신하려는 교육관련학계 및 문교당국의, 전통과 단절된 무리한 발상과 강제 개편, 국가의 안목부재에서 유래하는 방향 없는 교육정책, 여기에 본교의 이른 바 기초대학 중심의 일방적 운영과 당해 대학의 득세가 얹혀 사범대학의 정체를 시비하는 세력으로 작용하여 온 데 있다.
 
   6·25전란 이전 과 교수진은 창설기에 이능식(李能植, 동양사), 유홍렬(柳洪烈, 국사, 1911. 4∼1995. 6) 둘이었고, 1947년 8월 김성근(金聲近, 서양사)이 부임하였다. 이능식 교수는 동경제대 동양사학과 출신으로 사회과학으로서 역사학, 일본사학의 일환에서 이탈한 우리 역사학, 근대사회의 극복을 목표로 한 현대적 역사관 등을 제창하고(『근대사관연구』), 문화사, 미국극동정책사, 사학개론 등을 강의하였다. 김성근 교수는 와세다대학을 졸업, 서양문화 특히 르네상스 등 그 정신문명에 관해 주로 강의하면서 우리 서양사학의 기초를 닦았다 (『서양사개론』). 후에 사범대 학장을 역임하였다(1967. 3∼1971. 3). 경성제대 출신이고 조선·구미관계사를 특강하던 유홍렬 교수는 부임 일년 여만에 문리대로 옮겼고(1946. 12), 후임으로 김석형(金錫亨, 국사)이 뒤이어 전쟁 직전까지 재임하였고, 1949년 5월 손보기(孫寶基, 국사)가 신임하였다. 김석형 교수는 경성제대 출신으로 양정중학에 근무하였고 국역(國役)을 통해 조선시기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으며, 손보기 교수는 연희전문 문과와 서울대 대학원 석사를 거쳐 손진태·이인영의 학풍 하에 조선시기 왕권과 신권 등 권력구조·신분관계를 연구 강의하였다. 한편 손진태 교수가 1949년 6월 사범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신병으로 9월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김하구(金河龜, 서양사), 김정학(金廷鶴, 고고학), 이장욱(李章郁, 서지학) 교수가 강사로 지원하였다. 당시 교수시설 연구설비가 빈약하기 그지없던 때였으나 이때 형성된 역사의 체계적 이해와 자주적 인식, 이를 통한 역사교육의 함양은 교수·학생의 연구상 실천상 지표였고 면면히 이어져 과의 중요한 학통으로 자리잡았다. 졸업논문은 아직 사범대에만 있었는데 필수에 학점제였고 심사는 전임교수 전원이 하였다. 1948년 제1회 졸업생이 배출, 6·25난리 때까지 3회 졸업생 38명을 배출하였다. 그중 3분의 1이 대학교수로서 큰 업적을 내었다.
 

2. 成長과 興隆

학과소개 사진   1950년 6·25전쟁은 역사과에도 엄청난 타격이었다. 이능식 교수가 교육시찰단 명의로 북행하게 된 후 귀환을 못하고, 부산피난시절 손보기 교수가 연구차 도미(渡美) 후 과를 떠났다(1949∼1952∼1957 : 사대, 1964∼1987 : 연세대). 학생들 상당수는 학도병에 투입, 수학생은 극히 적었다. 교수진은 김성근 교수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1952년 6월 경성제대 출신 채희순(蔡羲順, 동양사, 1907. 5∼1986. 12)이 보강되었다. 채희순 교수는 십팔사략 강독, 중국정치, 교육제도사 등을 강의하였다('동양사개설'). 학교가 서울로 복귀한 뒤 과는 다시 정비되었다. 교수요원 하나가 증원되어 1956년 4월 본과 출신 변태섭(邊太燮, 국사)이 부임하였다. 그리고 1959년 3월에는 손보기 교수의 후임으로 김용섭(金容燮, 국사)이 취임하였다. 변태섭 교수는 고대사·고려사 강의를 담당하면서 무신란과 천민란의 정치·사회배경을 추구하고 고려정치제도의 골격을 해명하였고 (『고려정치제도사연구』) 역사교육에도 큰 활동을 하였다. 김용섭 교수는 조선시대사 및 최근세사, 사회경제사, 사학사 강좌를 담당하였고 조선후기의 민란·동학란·농업 및 신분변동· 농법 등의 연구를 통해 정통 역사학의 자세와 실천을 사회경제사학으로 구현하여 학과는 물론 학계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후에『조선후기농업사연구』 ,『한국근대농업사연구』등 김용섭저작집 8권으로 집대성). 강사진으로는 김용덕(金龍德, 한국중세사), 황수영(黃壽永, 한국미술사), 김원룡(金元龍, 고고미술), 김하구(金河龜, 영국헌정사, 성균관대), 박성수(朴成壽, 서양중세사), 민두기(閔斗基, 중국고대·근대사), 신태현(辛兌鉉, 중국근세사) 등 여러 교수들이 있었다.
 
   이와 함께 1956년 1회 졸업동문들이 중심이 되어(이정인, 강우철, 변태섭, 이원순) 본과를 근거로 역사를 연구하여 교육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 하에 역사교육연구회를 결성하고『역사교육』을 창간하였다(2016년 9월 139집 간행).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진전 및 그 연계를 고양한 최초·최고의 학회이며 역사 학회로서도 아주 이른 출범이었다. 1963년 사범대학에 교육대학원이 신설, 석사과정에 역사전공이 창설되어 1965년부터 중등교사들의 연구증진과 역사교육이 개발 촉진될 수 있는 터전이 더 넓어졌다. 한편 1968년 7·8월 경기도 암사리 신석기 유적을 발굴 정리하고 향토사자료실을 개설하여 우리나라 원시·고대사 및 향토사의 연구 및 교육의 기반도 조성되었다. 이는 과 창설 이래 매학기 봄가을로 수행되어온 학술고적답사의 성과를 정리할 필요성이 증대하던 차, 4년 1회씩 유적 발굴계획의 첫 작업이 이루어짐을 계기로 마련한 것이다. 과의 조교직이 전임으로 배정된 것도 이때였다. 교수·학생의 학구열은 매우 고조되고 과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을 연계하는 대본산(大本山)의 육성을 목표로 안팎으로 운영되었다. 대학원 진학도 두드러졌다.
 
   4·19와 5·16으로 어수선한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교수진에 수차례 변동이 생겼다. 1966년 3월 이민호(李敏鎬, 서양사)가 신임하였다. 이민호 교수는 서양근대사, 사학사, 사학개론 등을 주로 강의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독일근대의 사회경제연구를 개척하고 역사이론, 소시민층에 관한 소중한 성과를 내었다(후에 『근대독일사연구』, 『현대사회의 역사이론』, 『근대독일사회와 소시민층』으로 정리). 1967년 3월 김용섭 교수가 문리대로 옮겨가고(1975. 3 연세대로 이적), 이원순(李元淳, 국사)이 후임하였다. 이원순 교수는 조선시기의 사상 특히 서학을 국제계기에서 정리하였고(『조선서학사연구』, 『조선시대사논집』, 『역사교육』) 역사교육의 학문화 노력에 업적이 지대하다. 만년에 첫 교수선거로 사범대학장에 피선(1989. 7∼1991. 7) 학내의 난제 처리에 공로가 컸다. 1972년 8월에 채희순 교수가 정년 퇴임하고 이에 앞서 후임한 신채식(申採湜)이 얼마 후 공주사대로 이적한 뒤 오금성(吳金成)이 후임하였다. 신채식 교수는 송대 관료제, 오금성 교수는 중국의 과거·학교제도에 관심을 두었다. 1974년에는 김성근 교수가 단국대 대학원장으로 옮겨갔다. 당시 강사로는 정영호(鄭永鎬, 고고미술), 신형식(申瀅植, 한국고대사), 노명식(盧明植, 사학개론), 나종일(羅鐘一, 서양중근세사), 이정인(李廷仁, 역사교육) 교수 등이 출강하였다.

3. 난국(難局)과 시련

  1975년 역사과는 심각한 난국에 처하였다. 본교의 종합화로 관악교정으로 옮기면서였다. 당시 종합화는 사범대학으로선 처지가 애매한 채 강행되었다. 사대의 교수진 편성엔 원칙이 없었고 겸임발령으로 미봉하고, 강좌도 타 대학 유사강좌에 획일적으로 통합시켜 운영하도록 함이 지침이었다. 교육대학원이 폐지되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사회교육과 역사전공으로 되었다. 여기서도 해방 특히 휴전 이후 그 세가 커져온 모방 위주에 입각한 능률만능의 교육관 하에서 종합화가 사범대학의 역사성과 사범성을 배제·무시한 채 제도통합의 합리론만 앞세워 강행된 까닭이다. 지금까지도 각과의 교수인원이 4∼5명 정도씩 극소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사범대학 각과의 오랜 학통과 학문성과는 줄기를 잃거나 계통이 파손되어 위축되었다. 사범대학, 나아가선 한국의 줏대 있는 학문 교육에 엄청난 손상이었다. 역사과의 곤경은 더하였다. 과 교수 셋이 인문대학으로 이적하고(변태섭 ; 국사학과, 이민호 ; 서양사학과, 오금성 ; 동양사학과), 이원순 교수가 유일하게 이후 근 4년간 과를 홀로 운영하였다. 통합강좌운영은 물론 허상이었다. 각 단과대학 및 소속 학과의 설립목표 및 전통·학풍의 차이에서 강좌명이 유사하더라고 내용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이를 일방적으로 수용만 해야 하는 본과로선 명실이 모두 박약한 데다, 국사·동양사·서양사 및 고고미술 4개의 독립과의 역사계 강좌를 조합하여선 사범다운 역사과 강좌가 조성될 리 만무하였다. 사범대학 각과가 그러하지만 역사과의 강좌는 특히 국사·동양사·서양사 및 역사교과의 4개 부문이 유기적으로 엮여 교육 연구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실제 시간표 작성부터 불가능하였다. 학과 및 강좌운영은 이원순 교수의 지성, 타교 동문교수들의 협력과 교내 역사계 교수들의 배려, 그리고 대학원 졸업생 및 재학생들의 열의로 근근이 유지되었다. 강사로서 국사에 신형식, 김광수, 이범직, 동양사에 김규호, 서양사에 박성수, 문기상 등 여러 교수가 오래도록 수고하였고 그 의의가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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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정(歸正)과 진전

   연구와 교육의 파행, 학생지도의 낭패로 해당 과들을 중심으로 사범대학의 정비요구가 비등한 가운데, 역사과는 1979년 3월 윤세철(尹世哲, 역사교육 및 동양사), 허승일(許勝一, 서양사)이 함께 신임교수로 부임하여 안정과 활력의 전기를 맞았다. 윤세철 교수는 동양근현대사의 연구와 강의, 그리고 역사교육의 이론과 실제의 궤도설정에서 노력하여 이 방면에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허승일 교수는 로마사연구와 서양고대사를 강의하여 전문성과를 내었다(『로마공화정연구』, 『로마사입문』). 이어 1985년 3월에 이경식(李景植, 국사)이 신임하여 전임교수는 넷이 되었다. 이경식 교수는 조선시기의 토지·농업연구를 중심으로 그간 결여되어 있던 사회경제사계열의 강의를 보충하였다(『조선전기토지제도연구』1, 2). 이를 바탕으로 분류사에 의거한 한국토지제도사 저술에 나서 2006년 그 전반부가 출판되었다(『한국고대·중세초기 토지제도사』, 『한국중세 토지제도사』). 학과 교수진이 정비됨과 함께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연계, 그 이론 모색 및 응용방식의 탐구 등이 부각되었다. 역사교육계열 강좌의 보강과 1980년 과 교수가 공동 집필한 『역사교육론』의 출간은 그 표현이었다. 1986년 대학원 박사과정의 설치는 그 또 하나의 계기로서 1993년 8월부터 학위논문이 나오고 있다. 이로써 그간 역사교사 및 학자의 배출에 더하여 역사교과학의 전문가도 양성하게 되었다. 이 때 교수요원이 하나 더 증원되어 1989년 3월 김광수(金光洙, 국사)가 부임하였다. 김광수 교수는 고려 및 고대의 신분·관제연구를 통한 우리 고대·중세사의 새로운 체계와 역사교재 및 그 연구법의 개발에 대해 심도 있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1991년 8월 이원순 교수가 정년퇴임하고(1992. 3∼1994. 9 민족문화추진위원장, 1994. 9. 27∼1996. 11 국사편찬위원장), 1992년 3월 양호환(梁豪煥, 역사교육 및 서양근대사)이 후임하였다. 양호환 교수는 역사의 교수 학습에 관한 평가 및 방법 등을 강의하면서 역사교과학의 학문성, 전문성을 모색하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역사교육의 이론과 방법』, 『역사교육과 역사인식』). 이렇게 정비된 교수진의 틀은 그대로인 채, 2000년대 들어 인적 구성의 자연교체가 이루어졌다. 윤세철, 김광수, 허승일 교수가 차례로 2001년, 2003년, 2005년 정년하고 유용태(柳鏞泰, 동양사), 김태웅(金泰雄, 한국사), 김덕수(金悳洙, 서양사) 교수가 2002년, 2004년, 2006년 신임한 데 이어 교수요원의 증원에 따라 서의식(徐毅植, 국사)이 2007년 신임하였기 때문이다. 유용태 교수는 20세기 동아시아 농민사회주의의 연원을 이해하기 위해 종족과 공산(公産)을 중심으로 한 중국현대 농민문제를 연구하는 한편, 직업단체 중심의 직업대표제 민주주의의 모색,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비교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지식청년과 농민사회의 혁명』, 『환호 속의 경종』). 김태웅 교수는 한국근대의 재정사 연구를 통해 국가재정 구조의 변동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식민지 재정의 역사적 기반을 계기적으로 이해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인물사와 대중 국사교육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뿌리깊은 한국사』근대편,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 김덕수 교수는 이른바 ‘로마혁명’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 이행과정을 특히 프린키파투스 체제와 기사신분의 역할에 주목하여 연구하는 한편, 로마사와 관련된 영상자료를 역사교육에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로마제정사연구』, 『그리스와 로마-지중해의 라이벌』). 서의식 교수는 김광수 교수의 정년퇴임으로 생긴 한국고대사 강의의 공백을 메우고 삼국의 형성과정을 고조선사회의 계기적 발전 형태로 파악하는 등 한국고대사 이해의 체계화를 모색하고 있다(『뿌리깊은 한국사』고조선·삼국편). 2013년에는 오랫동안 학과를 이끌어 왔던 이경식 교수가 퇴임하고 박평식(朴平植) 교수가 착임하였다. 박평식 교수는 한국중·근세사와 역사교육을 책임하면서, 우리나라 전근대의 사회경제사를 상업사, 특히 상업인식과 정책, 그에 따른 상업계의 변동과 발전 사정의 체계화에 역점을 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조선전기 상업사 연구』, 『조선전기 교환경제와 상인 연구』).
 
   2016년 10월 과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역사를 발전논리에 입각해 통관하는 전체로서 파악하는 연구방식과 교육방향은 학문으로서의 역사학과 중등·고등교육의 역사 교수에서 모두 절실한 것으로 조용하나 면면히 형성·발전시켜온 과의 소중한 전통이고 역사학계의 특색 있는 학풍이다. 이러한 기반에서 역사과는 학계와 교육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본과 출신 각자 학계와 교육계 등 전문분야에서 이를 잘 발현하여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 자체가 역사교육연구회를 매개로 하여 항상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당면과제에 대해 논문 혹은 학술회의를 통해 학문으로 답하고 중등교육계와 연계하여 현실성을 견지함으로써 실현하고 있다. 1급 정교사 연수의 주관과 협력을 위시하여 교과서·교육과정 관련사항에 대한 참여와 평가, 매년 국내외 학자·교육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역사교육 심포지엄 그리고 중국·미국·일본 등 세계 각국과 역사의 학문·교육차원의 이해 교류를 위한 국제학술회의의 개최, 7차례에 걸친 전국역사학대회의 주관 등은 대표되는 사례들이다.
 
   지난 70년간 배출된 졸업생은 학사 1,800여명, 석·박사 180여명이다. 그 대다수는 중등교육계의 중진·소장으로 역사교육과 교육문제 개선의 중추역할을 담당하며 교육행정 교육연구담당자의 비율도 높다. 고등교육계에서 학문을 신장시키고 있는 이들도 수다하다. 또한 언론·문화계, 정치계에서 전공을 바탕으로 활약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1990년 12월 국가에서 우수교사의 체계적인 양성을 포기하고 임용고시제를 시행함으로써 졸업생의 교사 진출은 종전에 비해 감소한 대신 그만큼 다른 분야진출이 늘고 있다. 역사과가 그 학문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부단히 새롭게 제기되는 과제를 해결하면서 수시로 닥치는 난국을 타개해 나온 추진력의 소재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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