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과의 어제, 오늘과 내일

1. 序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연합군의 승리로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되었다. 이는 신국가건설시기의 도래를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 지식인들은 신국가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 학술·교육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물론 이는 민인 대중의 신국가 건설에 대한 소망과 기대에서 연유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식인은 올바른 교육체계의 수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직간접적으로 여기에 간여하였다. 그것은 인문·사회·과학·예술 등 여러 학식 부문에서 제국주의와 그 추종세력이 파쇄한 민족문화의 전통을 복원·확립하고 주체적인 신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다수 민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 우리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교육제도의 혁신과 함께 사범(師範)의 양성이 절실하였다.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창설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國大案)의 파동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학문 연구와 중등교사 양성에 진력하였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남북의 분단과 좌우대립의 격화로 여타 부문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위기의 시대를 맞기도 하였다. 급기야는 6·25 남북전쟁과 이후 5·16 군사 쿠데타 등 일련의 정치적 변동 속에 취해진 여러 교육 정책의 혼선으로 말미암아 그 본색이 바래지고 목표가 흔들리기도 하였다. 이 중 역사과는 학제의 잦은 변경에 따라 수차례 난국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인 대중의 후속 세대 교육에 대한 열정과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연면히 지속되는 가운데, 학과 역대 교수들은 사범 교육의 자세를 꿋꿋하게 지키며 역사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재학생들은 교육에 대한 신념으로 불타오르고 역사 학업을 부지런히 수행함으로써 역사과는 전통을 이어가고 명맥을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서울大學校 師範大學의 설립과 歷史科의 창설

   8·15 해방은 우리 스스로 우리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는 皇國臣民敎育의 중추를 이루며 대부분의 교육을 수행하였던 일본인 교사를 대신하여 한국인 교사가 민족 문화의 전통을 되살리며 신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미군정의 초기 교육 방침에서 두드러진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며 수립된 미군정은 무엇보다도 교육방침을 결정하여 공포하였다. 신조선 교육체제 확립의 제일보였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일반 방침은 일본주의적 색채의 말살과 관공립학교의 조선인 교육기관화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미군정은 교사의 부족을 우려하여 사범학교의 인원 확보에 유의할 것을 교육 방침으로 내세웠다. 아울러 미군정은 교육상 유의할 점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평화와 질서’를 강조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회상할 것을 주문하였다. 물론 이러한 미군정의 교육 방침과 요구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 근간을 두기도 하였지만 당시 한국민들의 희망과 요구를 담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이러한 방침에 따라 구체적인 집행에 들어갔다.
 
   우선 10월 1일 본과 과정이 설치되어 있었던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의 경우, 학교의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목적과 기능을 초등학교 양성에서 중등교사 양성으로 바꾸었다. 이들 사범학교는 중등교육 수료자로 있었던 학생을 입학 대상으로 하는 전문학교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아직 공식 호칭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호칭도 사범학교(Normal school)에서 사범대학(Normal college)으로 변경하였다. 이어서 1945년 11월 23일 조선교육심의위원회에서는 제7분과인 사범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사범학교 설치, 사범대학, 고등사범대학 설치, 교원의 재교육, 교원 자격 등을 심사 결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위원회는 신(新)학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과정에 각각 사범학교와 사범대학을 설정하였다. 우리 스스로 초등교사와 함께 중등교사를 육성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사범학교 본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신제도의 시행에 따라 사립대학의 각 상당 학년에 편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실제상 사범대학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상 사범학교라 불렀던 경성사범대학과 경성여자사범대학을 명실공히 사범대학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명칭은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교육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범교육이 국가주의 본산으로 치부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끝내 사범대학이 폐지됨과 함께 사범 명칭이 소멸하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주도 아래 19세기 말 이래 70년 간 일본 교육을 이끌어 왔던 사범교육을 종식시키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이 점에서 기존 경성사범학교의 교육이념과 교육방침이 천황주의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골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범교육은 폐지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미군정이 주도함에도 불구하고 사정이 달랐다. 즉 해방 초기 일본색 타파와 민주주의 건설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익, 좌익 모두 사범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제국주의 교육의 유산을 가장 강렬하게 비판하였던 좌익 진영의 경우도 사범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남로당은 사범학교의 확충 및 신설을 요구하였고, 민주주의민족전선도 사범학교 증설을 제안하였다. 또한 중도 좌파라 할 이만규(李萬珪)의 경우, 임시 정부의 교육 정책을 제안하는 가운데 교사 양성 목적 대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물론 이는 당시 교사의 수급 문제가 매우 절박하여 교사의 안정적 확보가 중요한 관건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당시 임시 교원 양성소가 여기 저기서 설치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점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특히 미군정이 일본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식 교육으로 재편하려고 하는 현실에서 교사 양성의 다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인들이 구상하였던 사범상(師範像)과 일제가 추구했던 사범상(師道像)이 달랐다는 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일본식 사범 즉 사도(師道)로서 제시되었던 경성사범학교의 교육 이념인 ‘대애지순(大愛至順)’이 천황에 대한 ‘감은봉사(感恩奉仕)’를 가리키는 복종주의였다면 당시 한국인이 구상하였던 사범은 이와 달랐다. 즉 일본식 사도가 “방법주의와 교육자 정신주의의 주입을 특징”으로 한 반면에 우리식 사범은 우리 주체의 사범으로서 인격과 지식, 기술을 완전하게 갖추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도 이미 일반 한국인들은 교사는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 도덕적인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인생다운 품성을 도야하야 조선 사람다운 조선 사람을 창조하는 것이 조선인 교원의 사명이자 의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이는 우리 전통의 사범에서 연유하였다. 즉 인·의·예·지·신을 바탕으로 학문에 정통하고 도리·도덕을 겸비한 우리의 사범이었다. 그 점에서 비록 일부 교수가 일제 사범학교 근무자이고 학교 시설이 일제 사범학교의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사범대학 설립은 지향과 목표, 이념의 차원에서 계보상 일제강점기 경성사범학교와 연계되기보다는 근대개혁기 한성사범학교와 연계되었다. 여기에 당국은 덕목으로 민주주의, 애국심, 국제협력을 설정하였다.
 
   1946년 3월 7일 학무국은 조선교육심의회가 건의한 신학제 방안에 근간하여 이를 검토한 끝에 사범대학의 신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를, 1946년 9월 신학기부터 실시하기로 한 신학제에 따라 사범대학으로 승격시키기로 예정하였다. 곧이어 이들 사범대학은 학과 설치와 함께 학생 모집에 들어갔다. <표 1>은 사범대학 최초 학과 학생 모집 현황이다.

표1 사범대학 최초 학과의 학생모집

시험일정 대학 모집 학과 및 인원
1946.7.10~7.13 경성사범대학 예과 : 문과 150명, 이과 150명 학부 : 교육과, 국문과, 역사과, 영문과, 체육과 각 40명
경성여자사범대학 국문과 예과, 영문과 예과, 역사과 예과, 교육과 예과, 가사과 예과(미술과 신설준비) 각 50명
1946.7.7~7.4 대구사범대학 승격예정
출전 : 동아일보, 1946년 3월 11일, 5월 20일 ; 조선일보, 1946년 6월 19일

  경성사범대학 최초의 학과는 교육과, 국문과, 역사과, 영문과, 체육과로 각각 40명이었다. 또한 경성여자사범대학의 경우도 국문과, 영문과, 역사과, 교육과, 가사과로 각 50명이었다. 아울러 대구사범대학의 학과도 이와 비슷하게 설치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학과 설치는 당시 지식인들과 일반 민인들의 소망을 잘 보여주는 조처였다. 역사과의 경우, 이러한 방향은 일찍부터 잡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기만 교육 속에 자라난 학생들이 참다운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시급히 지난 4천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아 신국가건설에 정신의 주춧돌을 삼을” 것을 주문하였다. 이는 역사(우리 역사) 없는 역사교육의 청산과 함께 우리 역사를 본체로 하는 역사교육의 부활을 의미한다. 또한 진단학회의 경우, 건국의 첫 사업으로 중등학교와 초등학교 국사와 지리교과서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이는 국어 교과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국사 관련 단체들이 속속 늘어났다. 조선사회교육협회의 경우, 국사(國史) 국문(國文) 보급운동을 벌였다. 그 밖에 국사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어 역사 서적 보급과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당국도 여기에 적극 관여하였다. 1946년 5월 문교부는 “자주독립과 아울러 우리의 빛나는 역사를 찾자는 전 국민적 요망에 대응하여” 국사관(國史館)을 설치하였다.
 
   한편 국사는 교사 양성과 성인 교육에 필수 과목이었다. 1945년 12월 군청청 학무과와 경기도 학무과에서는 전국 초중등교원의 대표자를 모아 강습회를 열었다. 여기서는 국어, 국사, 공민 등의 교육이념, 교육제도, 교과서 내용 및 각 교과서의 편찬 취지의 취급법 등을 재교육시켰다. 이어서 1946년 1월에는 경기고녀에서 중등교원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도 교수 과목은 국어(國語), 공민(公民), 국사(國史)였다. 그리고 1946년 4월 현재 중등교원 임시양성기관의 모집 학과 및 정원 현황을 보면 국사는 국어와 마찬가지로 정원이 300명으로 전체에서 16%를 차지하였다.
 
   또한 성인교육에서도 국사는 누락되지 않았다. 1946년 1월 성인교육심의회에서는 이남의 4만 여 부락에서 공민, 국문, 국사를 가르치는 강습회를 계획하였다. 당시 일반 민인들의 국사에 대한 욕구는 매우 컸다. 김성칠이 지은 『조선역사』의 경우, 2만부를 인세 계약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시인 신경림은 국민학교 5학년 한 해 동안에 이 책을 무려 다섯 번이나 읽었다. 우리 글로 된 우리 역사가 그를 흥분시켰기 때문이다. 또 일부 국사 교사들은 일제 강점기에 비장한 우리 역사책을 기초로 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하여 흥분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우리 역사에 대한 갈증이 이처럼 컸다. 따라서 경성사범대학과 경성여자사범대학에 사학과(역사과)를 설립하려고 했던 계획은 역사 교사를 양성하여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자기 줏대를 세우고자 했던 국민적 열망과 학계·교육계의 노력 덕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방향은 이후 여건의 극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저를 이루며 면면히 흘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안은 1946년 7월 당국이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즉 미군정청은 문리과 대학을 비롯하여 전문학교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경성사범대학과 경성여자사범대학도 예고 내용과 달리 국립서울대학교에 통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경성사범대학과 경성여자사범대학은 서울대학교에 통합한 뒤 1946년 9월 18일 첫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이 때 사범대학에 설치된 학과는 최초 학과와 달랐다. 역사과 명칭이 사라지는 대신에 이른바 사회생활과 명칭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수학과, 물리화학과, 생물과 등이 신설되었다. 이 중에서 역사과 명칭을 사회생활과 명칭으로 바꾼 것은 미군정청이 1946년 9월 교수요목 제정을 앞두고 초중등학교 교과로서 사회생활과를 신설하면서 사범대학의 학과 설치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요목에 따르면 지리, 역사와 공민을 폐지하고 사회생활과라는 통합교과로 묶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의돈(黃義敦) 등 역사 담당 편수관을 비롯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들과 여타 대학교수들의 격렬한 반대가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미군정청의 작정과 강행으로 사회생활과는 교수요목에서 통합사회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사범대학의 사회생활과 명칭도 굳어지는 듯하였다. 이처럼 사범대에서 역사과(사학과) 명칭의 소멸은 일반 민인들과 학계·교육계의 요구에 근간하기보다는 미군정청의 교수요목 방침의 강행에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사회생활과의 교과 과정은 역사 중심의 교과과정이었다. <표 2>는 1946년 ~1947년 사회생활과 전공 과목 개설 현황으로 이를 잘 보여준다.

표 2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생활과 전공과목 개설과 강의 담당자(1946~1947)

1947년
 문화사(이능식4) 고고학(김정학2) 국제법(고광림3) 사학개론(이능식3) 조선중세사(유홍렬3) 조선사연습(유홍렬3) 동양사연습(이능식2) 조선구미관계사(유홍렬3)  문화사(이능식4) 조선중세사(유홍렬3) 근세철학사(김계숙4) 국제법(고광림3) 동양사연습(이능식2) 사학개론(이능식3) 조선사연습(유홍렬2)  문화사A(이능식4) 문화사B(김계숙4) 조선사개론(유홍렬3) 서양사개론(김성근3) 철학개론(김석목4) 지리학개론(이지호3) 근세철학사(김계숙3) 종교철학(김종흡3) 윤리학개론(김석목2) 법학개론(고광림2) 세계지리각론(이봉수2) 동양윤리(한상갑3) 사학개론(이능식3) 동양사연습(이능식3) 조선사특강(유홍렬2) 조선사연습(유홍렬2) 서양사특강(김하구2) 철학연습(김계숙2) 지리학특강(이봉수2)  국사개론(유홍렬2) 서양사개설(김성근3) 조선지지(이지호4) 근세철학사(김계숙3) 십구세기문화사(김계숙4) 윤리학개론(김석목2) 세계지지(미주, 최복현4) 세계지리(아세아, 이봉수2) 동양철학사(한상갑3) 인문지리(경제, 최복현4)) 인식론(김석목4) 사학개론(이능식3) 동양사연습(이능식3) 조선사특강(유홍렬2) 국사특강(이홍직2) 지질학(손치무2) 칸트의 윤리사상(김기석2) 서양사특강(김성근3) 지리연습(이지호3) 지리학방법론(이봉수2) 동양사개설(이능식2) 사회생활과교수법 (이준하2) 사회생활과교육연습 (이지호, 김성근, 이능식6)
  비고 : 강의 제목 옆 괄호에 강의 담당자명과 학점수를 표시함 출전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30년사 편찬위원회, 『民主敎育의 搖籃』, pp.61~71, 1976.

   이 시기 교과과정은 이처럼 역사 교과목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지리학, 철학, 윤리학이 약간 첨가되어 있다. 그리하여 역사학 강좌가 사회생활과에서 주류로 자리잡았다. 강의를 담당했던 역사과의 교수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사의 경우, 경성제대 출신이고 사회사와 대외관계사를 전공한 유홍렬(柳洪烈, 1945.10.31~1947. 7), 경성제대 출신으로 조선시기 국역(國役) 연구에 몰두한 김석형(金錫亨, 1946. 3. 25~1946. 7),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한국 민속학과 고대사의 기초를 닦은 손진태(孫晉泰, 1949. 2. 28~1950. 2. 8), 조선 시기 권력 구조와 신분관계를 전공한 손보기(孫寶基, 1949. 5~1957)가 재직하였다. 동양사의 경우는 도쿄제대 동양사학과 출신으로 사회과학으로서의 역사학, 일본사학의 일환에서 이탈한 우리 역사학, 근대 사회의 극복을 목표로 한 현대적 역사관을 제창한 이능식(李能植, 1945.10.31~1950. 6)이며(『近代史觀硏究』), 서양사의 경우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서양 문화를 전공하면서 우리 서양사학의 기초를 닦은 김성근(金聲近, 1947. 8~1974. 2)이다. 강사로는 초기에 성균관대에 재직 중이었던 김하구(金河龜, 서양사), 김정학(金廷鶴, 국사, 1945~1947), 이장욱(李章郁, 서지학) 등이 출강하였다. 또한 이들 교수의 해방전 경력을 보면 사범학교에 재직하지 않았으며 다만 일부가 중등교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들 모두 경성제대, 도쿄제대, 와세다대학 등 정규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이처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는 일제하의 경성사범학교와 인적으로 연계되지 않은 가운데 역사학에 토대를 두고 신국가의 역사교육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특히 이능식 교수는 국대안 파동으로 강의가 마비되고 휴교 중에도 학생들을 모아 연구실에서 강의를 이어가고 사학회(史學會)를 만들어 역사학 중심의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당시 이러한 학풍은 다른 일부 학생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표 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생활과 역사전공 졸업생 현황 (1948~1950)

졸업연도전공분야 1948 1회 1949 2회 1950 3회 계(구성비)
역사 6 15 17 38(59%)
지리 4 2 3 9(14%)
사회 5 3 9 17(27%)
15 20 29 64

  이처럼 사회생활과는 모학문의 차이, 교과 운영의 실제적인 분과 운영 등으로 말미암아 통합학과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1950년 6월 1일에 전공별 3개 학과로 분과되고 말았다. 사회생활과는 1948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표 3>은 1948년부터 6.25 남북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 배출한 졸업생 현황이다. 당시 학생들은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아직 사범대에만 있었던 졸업 논문을 제출하도록 되어 있던 상황에서 논문 주제에 따라 전공이 결정되었다.
당시 사회생활과에서 역사 전공자가 과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들 졸업생은 총 38명으로 그 중 3분의 1이 중등교육계에 중진으로 활약하였고 3분의 1이 대학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훗날 한국 역사교육의 초석을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한 역사교육연구회의 주축이라 할 이정인(李廷仁, 1회), 강우철(康宇哲, 2회), 변태섭(邊太燮), 이원순(李元淳) 등이 졸업하였다. 이처럼 교수시설, 연구설비가 빈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형성된 “역사의 체계적 이해와 자주적 인식, 이를 통한 역사교육의 함양은 교수·학생의 연구상 실천상 지표였고 면면히 이어져 과의 중요한 학통으로 자리잡았다.”

3. 歷史科의 학문연구와 역사교육의 방향

  역사과는 1950년 6·25 남북전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능식 교수가 교육시찰단 명의로 북행하게 된 후 귀환을 못하고, 부산피난시절 손보기 교수가 연구차 도미(渡美) 후 학과를 떠났다. 학생들 상당수는 학도병에 투입되어, 수학생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역사과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학문 연구와 역사 교육에 매진하였다. 이 중에서 김성근교수는 학과를 이끌어 나가면서 서양의 전반 사조의 발전과 중요한 사실의 대강을 강론한 『서양사개론』을, 6·25 남북전쟁 직전인 1950년 이른 봄에 시작하여 피난 시절의 악전고투 끝에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에 출간하였다. 그것은 재래의 일본적 서양사관과 서술 방식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려는 시도였다.
 
   한편, 김성근 교수는 역사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통합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우선 역사, 지리, 공민 등 3학과 폐합의 정당성과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는 세계적인 미해결의 문제임을 강조하였다. 즉 통합사회과가 세계 각국에서 적용되는 예는 많지 않은 반면에 계통적인 국민사가 많으며 역사과가 독립교과로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역사교과의 강화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국민의식의 확립을 들고 있다. 이는 국가주의가 아니라 현하의 위기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민족적 공동운명의식과 운영 연대 의식을 내실로 하고 있어 역사적인 이해와 성찰을 도외하고는 파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둘째, 후진성의 극복을 강조하면서 세계사적 통찰과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엄정한 자기비판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것이 역사교육이 담당해야 할 주요한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즉 주체성의 확립과 국제정치 및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서방문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교수의 역사교육에 대한 이러한 자세와 열정은 훗날 역사교육연구회의 창립과 역사교육연구의 초석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적 소양을 강조하면서 사범대학의 교사양성 방향을 제시하였다. 학문과 교육은 대상·목적의 차이에서 각각의 중점을 달리 둘 뿐, 상호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사범교육은 이러한 일체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1952년 6월에 취임한 경성제대 출신 채희순(蔡羲順, 동양사, 1907. 5~1986.12)은 동양사 사료 강독, 중국정치, 교육제도사 등을 강의하면서 1954년에 이전의 『동양사개론』(1949)을 보완하여 출간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동양문화의 우수성을 강조 천명하여 악랄한 제국주의의 지독한 속박에서 해탈하여 자주적인 국가를 회복하고 약소민족의 오명을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56년 4월에 부임한 변태섭(국사)은 최초 본과 출신 교수로 고대사와 고려사 연구에 혁혁한 성과를 남겼다(『高麗政治制度史硏究』, 『高麗史硏究』). 특히 그는 만적의 난과 무신란 연구 등 고려시기 정치 변동에 대한 연구를 시발로 고려 시기 정치제도사 연구를 본격화함으로써 고려시기의 역사를 발전적인 안목에서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향과 방법은 역사학에 중심을 두면서도 늘 역사교육의 제반 문제들 즉 학생들의 역사 이해를 체계화하려는 시도와 맥을 같이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1959년 3월 손보기교수의 후임으로 부임한 김용섭(金容燮, 국사)은 조선시대사 및 근대사, 사회경제사, 사학사 강좌를 담당하면서 진주민란, 동학란 등 민족내에서의 계급적 대립 문제에 대한 연구를 계기로 조선후기의 농업, 농업문제에 천착함으써 사회 발전의 안목에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한국사를 체계화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朝鮮後期農業史硏究』, 『韓國近代農業史硏究』, 『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朝鮮後期農學史硏究』, 『韓國中世農業史硏究』). 이는 타율성과 정체성으로 점철된 제국주의 사관의 극복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정통 역사학의 자세와 실천을 사회경제사학으로 구현하여 학과는 물론 학계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로 사범대학이 위기를 맞던 시절을 지나 1966년 3월에 부임한 이민호(李敏鎬, 서양사)는 서양근대사, 사학사, 사학개론 등을 주로 강의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독일근대의 사회경제연구를 개척하고, 역사이론, 소시민층에 관한 소중한 성과를 내었다(『近代獨逸史硏究』, 『近代獨逸社會와 小市民層』). 1967년 7월 김용섭 교수가 문리대로 옮겨간 뒤 후임으로 취임한 이원순(李元淳, 국사)은 연행사행 연구를 시발로 역사의 국제 계기에 중점을 두고 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역사학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한국교회의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韓國西學史硏究』, 『韓國天主敎會史硏究』, 『朝鮮時代史論集』). 특히 이원순 교수는 역사교육 연구에 매진하여 역사학과 역사교과의 거리를 좁혔으며 우리 나라 최초로 역사교육론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훗날 우리나라에서 전문적인 역사교육 연구자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였다.
 
   또한 역사과는 1968년 7·8월 경기도 암사리 신석기 유적을 발굴 정리하고 향토사자료실을 개설하였다. 이는 원시 고대사 및 향토사의 연구 및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런 작업이 학과 창설 이래로 매년 봄가을로 수행되어온 학술고적답사와 매우 밀접하다는 점에서 교수와 학생들의 학구열을 배가시킬 수 있었으며 나아가 역사학과 역사교과를 연계하는 작업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다음 역사과 교수들은 현장 교사들과 더불어 역사교육연구회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과 출신 대학교수 및 현직 중등교사들을 중심으로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역사교육의 주체적인 자세와 방법론의 체계화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꾀했다. 그리하여 역사교육연구회는 초창기에는 연간지로 『역사교육(歷史敎育)』을 발행하였고 현재는 계간지로 발간하여 역사교육연구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 학회지에는 두 가지의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는 기존 역사학계에 드리워져 있는 식민사관의 극복 문제와 관련되어 국사 연구 및 국사교육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다. 또 하나는 역사교육의 체계화에 초점을 두고 방법론 문제에 대한 탐구이다. 이러한 두 조류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을 불가분의 일체로 파악한 가운데 연구와 교습의 비중 여하, 학문과 교습의 중점 여하에 나오는 경향이었다. 그리하여 이 두 조류는 상보적인 관계에서 상호 발전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현재 『역사교육』지는 우리나라 역사학·역사교육 관련 학회지에서 『역사학보』지 다음으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과는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와 관악교정 이전으로 난국과 시련을 다시 맞이하였다. 우선 과 교수 4인 중에서 3인이 인문대학으로 이적함으로써 강좌를 운영할 수 있는 교수 인원이 절대 부족이었다. 이원순 교수가 4년 가까이 홀로 과를 운영하였다. 이는 연구와 교육의 파행, 학생 지도의 낭패로 나타났고, 이러한 현상은 사범대학 공통의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당 학과들을 중심으로 사범대학의 정비 요구가 비등하였으며 그 결과 역사과는 1979년 3월 윤세철(尹世哲, 역사교육 및 동양사), 허승일(許勝一, 서양사)이 함께 신임교수로 부임하여 안정과 활력의 전기를 맞았다. 윤세철 교수는 중국 국민혁명 연구를 통해 중국 근대화의 방향과 특질을 규명하는 한편 역사교육의 이론과 실제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제시하였다. 특히 세계사교육 연구의 방향과 방법론 탐구에 노력하여 이 방면에 관심을 환기시켰다. 허교수는 로마사 연구와 서양고대사를 강의하는 한편 로마사 및 서양고대사 연구 방면에서 지평을 넓혔다(『로마공화정연구』, 『로마사입문』, 『로마제정사』). 이어 1985년 3월에 李景植(국사)이 신임하여 전임교수는 넷이 되었다. 이교수는 조선시기의 토지 농업연구를 중심으로 그 동안 결여되어 있던 사회경제사 계열의 강의를 보충하였다(『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Ⅱ, 『韓國 古代 中世初期 土地制度硏究』, 『韓國中世土地制度史硏究』).

   과 교수진이 정비됨과 함께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연계, 그 이론 모색 및 유용 방식의 탐구 등이 부각되었다. 역사교육계열 강좌의 보강과 1980년 과 교수가 공동 집필한 『역사교육론』의 출간은 그 표현이었다. 1986년도에 신입생을 선발한 대학원 박사과정의 설치도 그 계기로서 1993년 8월부터 학위논문이 나오고 있다. 그간 역사교사 및 학자의 배출에 더하여 역사교과학의 전문가도 양성하게 되었다(2016년 8월 현재 박사학위 수여자 22명). 이에 교수 요원이 하나 더 증원되어 1989년 3월 김광수(金光洙, 국사)가 부임하였다. 김광수 교수는 우리 역사의 시초부터 민족의 기원 형성 및 국가 성립 문제를 계기적이고 발전적으로 제시하고 고려의 신분 관제 및 사학사 연구를 통해 우리 고중세사의 새로운 체제를 해명하는 한편 역사교재 및 그 연구법의 개발에 대해 심도있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1991년 8월 이원순 교수가 정년 퇴임하고 1992년 3월 양호환(梁豪煥, 역사교육 및 서양사)이 후임하였다. 양호환 교수는 역사의 교수 학습에 관한 평가 및 방법 등을 연구하여 역사교과학의 학문성 및 전문성을 모색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윤세철, 김광수, 허승일 교수가 차례로 정년 퇴임한 뒤 유용태(柳鏞泰, 동양근현대사 및 역사교육), 김태웅(金泰雄, 한국근현대사 및 역사교육), 김덕수(金悳洙, 서양고대사 및 역사교육) 교수가 2002년, 2004년, 2006년에 신임하였다. 2007년에는 서의식(徐毅植, 한국고대사 및 역사교육) 교수가 부임하였고, 2013년에는 이경식 교수가 정년퇴임하고 이어 박평식(朴平植, 한국중근세사 및 역사교육) 교수가 착임하였다. 2021년과 2022년에는 서의식, 유용태 교수가 차례로 정년 퇴임하였고, 2022년 9월에 최재영(崔宰榮, 중국고중세사 및 역사교육), 김성현(金聖玹, 한국고대사 및 역사교육) 교수가 부임하였다. 2023년에는 양호환 교수가 정년 퇴임한 뒤 이미미(李美薇, 역사교육) 교수가 착임하였다.

4.歷史科 敎科運營의 변천과 歷史敎師 養成

 역사과는 6.25 남북 전쟁 이후 정치적 변동과 학제 변경, 학문 연구 동향의 추이에 따라 과 교과과정도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표 4>는 현재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1954년 입학자와 1958년 입학자의 학적부를 통해 복원한 전공 및 역사 교양 관련 이수 현황이다.

표 4 1950년대~1960대 초반 역사과 개설 교과목(1956~1963)

사학강독(1), 문화사(4), 국사강독(1), 동양사강독(1), 서양사강독(1), 한국제도사(3), 사적해제(2), 사학개론(2), 국사개론(4), 동양사개론(2), 서양사개론(4), 한국고대사(3), 한국중세사(3), 한국근세사(3), 한국최근세사(3), 동양고대사(3), 동양중세사(3), 동양근세사(3), 동양최근세사(3), 서양고대사(3), 서양중세사(3), 서양근세사(3), 서양최근세사(3), 국사연습(3), 동양사연습(3), 서양사연습(3), 한국중세사특강(3), 동양사특강(3), 서양사특강(3), 한국경제사(3), 한국사상사(3), 고고학(2), 동서문화교류사(3), 한국사상사(3), 역사교재론(3), 역사교수법(3), 논문연습(3)

표 5 1963년 역사과 교과과정

구분교과 내용
전필 국사개론 3(3)원시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 발전과정과 각 시대의 성격을 개괄적으로 이해시키고 특히 그 주조(主潮)를 파악시킴에 치중함.
 동양사개론 3(3)동양 여러 민족 국가의 흥망성쇠가 인류 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에 유의하여 그 개략을 중점적으로 해설함.
 서양사개론 3(3)서양의 여러 민족과 국가의 흥망 및 그 문명의 발전에 관한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하되 특히 그 주조(主潮)의 파악에 유의함.
 사학강독 2(2)역사 관계의 초보적인 원서(영문 혹은 한문)에 대한 독해력을 기름과 아울러 사실에 대한 정밀한 지식을 파악케 함.
 국사강독 3(3)한국사에 관한 문헌의 독해력을 기름과 동시에 사실(史實)에 대한 정밀한 지식을 파악케 하여 한국사 연구의 기반을 제공함.
 동양사강독 3(3)일반 동양사적(十八史略, 資治通鑑 등)을 읽힘으로써 동양사 사료의 독해력을 기름과 아울러 사실에 대한 정밀한 지식을 갖게 함.
 서양사강독 3(3)서양사에 관한 원서의 독해력을 기르는 동시에 사실(史實)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게 함.
 사학개론 3(3)역사학의 학문적 특질과 그 발전의 대강 및 역사 연구법의 개요(槪要)를 이해케 함으로써 역사 연구의 기초적 지식을 습득케 함.
 역사연구법 3(3)역사학의 연구활동에 있어서 체득해야 할 기본적인 기술면을 사료(史料), 사료의 비판, 종합, 표현의 각 분야에 걸쳐 강술함.
 논문지도 3(3)역사학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논문을 구성하는 방법을 직접 학생들이 논문 작성을 통하여 체득(體得)케 함.
 역사과 교재론 3(3)역사과(국사와 세계사)의 교재를 어떻게 발견 수집하고, 이를 어떻게 학습지도에 활용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직접 실습을 통하여 이해케 함.
전선 한국사회경제사 3(3)한국사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사회 경제적 측면을 이해함을 목표로 하여 고대, 중세, 근대 등 각 시대의 사회구성과 경제구조와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각 시대 간의 전환기의 문제를 파악케 하는 데 치중함.
 한국사상사 3(3)한국의 고유사상, 불교사상, 유교사상과 근대사상의 내용, 변천과정 및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케 함.
 한국제도사 3(3)한국사 각 시대의 여러 제도(정치, 사회, 경제 제도 등)를 살펴봄으로써 각 시대의 구조상의 특징을 이해시킴.
 동서교섭사 3(3)고대, 중세 및 근대의 동서문화 교류의 경로(經路)와 상호영향을 밝히고 아울러 그 문화유산이 현대 인류에게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이해케 함.
 한국시대사 6(6)국사개론에서 얻은 지식을 기초로 하여 각 시대(고대, 중세, 근대, 최근세)의 특징과 사실(史實)을 보다 깊고 정밀하게 이해시키는 데 주안을 둠.
 동양시대사 6(6)동양사개론에서 얻은 지식을 기초로 하여 각 시대(고대, 중세, 근대, 최근세)의 특징과 사실(史實)을 보다 깊고 정밀하게 이해시키는 데 주안을 둠.
 서양시대사 6(6)서양사개론에서 얻은 지식을 기초로 하여 각 시대(고대, 중세, 근대, 최근세)의 특징과 사실(史實)을 보다 깊고 정밀하게 이해시킴.
 국사연습 6(6)국사의 중요한 여러 문제에 관한 조사 및 연구 활동을 촉구(促求)하는 동시에 사료(史料)의 해석 능력과 올바른 사관을 훈련함.
 동양사연습 6(6)동양사의 중요한 여러 문제에 관한 조사 및 연구 활동을 촉구하는 동시에 사료의 해석 능력과 올바른 사관을 훈련함.
 서양사연습 6(6)서양사의 중요한 여러 문제에 관한 조사 및 연구 활동을 촉구하는 동시에 사료의 해석 능력과 올바른 사관을 훈련함.
 국사특강 6(6)한국사 중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를 뽑아 이를 깊고 정밀하게 지도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의 지식과 방법을 이해케 함.
 동양사특강 6(6)동양사 중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를 뽑아 이를 깊고 정밀하게 지도함으로써, 동양사 연구의 지식과 방법을 이해케 함.
 서양사특강 6(6)서양사 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한 보다 깊고 정밀한 이해를 위주함.
출전: 『1963~196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요람』

   이전과 대비할 때 과목명의 변동이 약간 보이나 기본적으로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사교육강독 등을 비롯한 강독 과목에 ‘교육’명칭이 부여되었다. 이는 단순히 명칭상의 변경이 아니라 학문 연구에 토대를 두되 교육 현장과 밀접하게 하여 교과학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교과목 개설은 1975년 캠퍼스 이전과 종합화 이후 교과과정의 대대적인 개편 속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표 6>은 1976~1980년 교과목 개설 현황이다.

표 6 1976~1980년 역사과 개설 교과목

전필국사교육강독(3, 3), 서양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역사교육(3, 3), 역사교재론(3, 3), 논문지도(3, 4)
전선한국고대사(3, 3), 동양고대사(3, 3), 한국사적해제(3, 3), 동양중세사(3, 3), 한국근세사(3, 3), 서양근세사(3, 3), 한국제도사(3, 3), 한국중세사(3, 3), 서양중세사(3, 3), 서양현대사(3, 3), 동양사연습(3, 3), 서양고대사(3, 3), 한국최근세사(3, 3), 동양근세사(3, 3), 한국사연습(3, 3), 서양사학사(3, 3), 동양현대사(3, 3), 서양사연습(3, 3), 한국사상사(3, 3), 국사특강(3, 3), 서양사특강(3, 3), 동양사특강(3, 3), 동양사상사(3, 3)

   이른바 유사 과목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일부 과목은 인문대와 합반하거나 합동하였다. 가령 한국중세사, 동양중세사, 한국사상사, 국사특강, 동양사연습, 서양사특강, 동양사특강, 한국사연습, 동양고대사, 고고학개론, 사학개론, 서양고대사, 한국최근세사, 동양근세사, 서양중세사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들 강좌 중 사범대학 학과와 기초대학 학과 간에 명칭이 유사하게 보이는 과목에 학문 계열 번호를 동일하게 부여하였다. 물론 국사교육강독, 동양사교육강독, 서양사교육강독, 역사과교수법, 역사교재론 등 일부 강좌는 예전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개설사, 시대사 강좌 등 대부분의 강좌들은 교수 지식 내용의 체계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강좌들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학과와 합동으로 수강해야 했다. 즉 이 강좌들은 국사, 동양사, 서양사 및 고고미술 4개의 독립과에 각각 편성된 강좌로 이들 과의 개별 강좌를 조합한 데 지나지 않았다. 실제 시간표 작성부터 불가능하였다. 이 점에서 명칭이 유사하다고 하여 유사과목으로 묶는 강좌 운영 방식은 단과대학 및 해당 학과의 설립 목표 및 전통·학풍에 벗어날뿐더러 강좌간의 유기적인 연계성을 깨뜨림으로써 파행성과 기형성을 야기하였다. 이런 문제점은 학과 교수가 충원되고 강좌가 학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1978년도에 이르러 다소 해소되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학과 역사교과의 연계, 그 이론 모색 및 응용 방식의 탐구 등이 부각되었다. 1980년 과 교수가 공동 집필한 『역사교육론』의 출간은 그 표현이었다. 그 밖에 1977년도에 논문지도 학점 제도가 폐지되었다.

표 7 1981~1984년 역사과 개설 교과목

전필국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서양사교육강독(3, 3), 사회과교육론(3, 3), 교재론【세계사교재론(3, 3), 국사교재론(3, 3)】, 연습【한국사연습(3, 3), 동양사연습(3, 3), 서양사연습(3, 3)
전선한국고대사(3, 3), 한국중세사(3, 3), 한국사적해제(3, 3), 한국제도사(3, 3), 동양고대사(3, 3), 동양중세사(3, 3), 서양고대사(3, 3), 한국근세사(3, 3), 동양근세사(3, 3), 서양중세사(3, 3), 서양근세사(3, 3), 서양현대사(3, 3), 역사과교수법(3, 3), 한국사상사(3, 3), 한국사특강(3, 3), 동양현대사(3, 3), 동양사특강(3, 3), 동양사상사(3, 3), 서양사특강(3, 3)

   각 연도 이전의 교과과정과 비교할 때 주목할 점은 역사교과 계열 강좌가 보강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교재론이 국사교재론과 세계사교재론으로 분화되었다는 점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는 종전의 역사교재론이 강사의 전공 분야에 따라 국사든 세계사든 특정된 분야를 선택하여 가르침으로써 국사와 세계사를 별도로 가르치는 현장과 괴리되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역사교육 강좌가 지속적으로 보강되었다. 역사교육론(전필), 역사와 역사교육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다음 <표 8>에서 <표 13>까지는 1985년 이후 현재까지 교과과정의 변천을 보여준다. 과목의 신설, 과목명의 변경 등이 보이나 커다란 골격에는 변함이 없다. 교과과정의 구조가 안정 구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표 8 1985~1988년 역사과 개설교과목

전필서양사교육강독(3, 3), 국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역사교육론(3, 3), 연습【한국사연습(3, 3), 동양사연습(3, 3), 서양사연습(3, 3)】, 교재론【세계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국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시대사【한국고대사(3, 3), 동양고대사(3, 3), 동양중세사(3, 3), 서양고대사(3, 3), 서양중세사(3, 3), 한국중세사(3, 3), 한국근세사(3, 3), 한국최근세사(3, 3), 동양근대사(3, 3), 서양근세사(3, 3), 서양현대사(3, 3), 동양현대사(3, 3)】
전선한국사적해제(3, 3), 한국정치제도사(3, 3), 아시아지역사특강(3, 3), 사학사특강(3, 3), 한국사회경제사(3, 3), 서양사상사(3, 3), 역사학과 역사교육(3, 3), 한국사상사(3, 3), 한국사특강(3, 3), 동양사특강(3,3), 동양사상사(3, 3), 서양사특강(3, 3)

표 9 1989~1992년 역사과 개설교과목

전필서양사교육강독(3, 3), 국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역사교육론(3, 3), 연습【한국사연습(3, 3), 동양사연습(3, 3), 서양사연습(3, 3)】, 교재론【세계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국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시대사【한국고대사(3, 3), 동양고대사(3, 3), 동양중세사(3, 3), 서양고대사(3, 3), 서양중세사(3, 3), 한국중세사(3, 3), 한국근세사(3, 3), 한국최근세사(3, 3), 동양근대사(3, 3), 서양근세사(3, 3), 서양현대사(3, 3), 동양현대사(3, 3)】, 특강【한국사특강(3, 3), 동양사특강(3, 3), 서양사특강(3, 3)】
전선한국사적해제(3, 3), 한국정치제도사(3, 3), 아시아지역사특강(3, 3), 사학사특강(3, 3), 한국사회경제사(3, 3), 서양사상사(3, 3), 역사학과 역사교육(3, 3), 한국사상사(3, 3), 동양사상사(3, 3)

표 10 1993~1996년 역사과 개설 교과목

전필 서양사교육강독(3, 3), 국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역사교육론(3, 3), 역사와 역사교육(3, 3)
전선 한국고대사(3, 3), 한국사적해제(3, 3), 한국정치제도사(3, 3), 한국근대사(3, 3), 동양고대사(3, 3), 동양중세사(3, 3), 아시아지역사특강(3, 3), 서양고대사(3, 3), 서양중세사(3, 3), 서양근대사(3, 3), 서양사학사(3, 3), 한국중세사(3, 3), 한국근세사(3, 3), 한국사연습(3, 3), 한국사회경제사(3, 3), 한국현대사(3, 3), 동양근대사(3, 3), 동양사연습(3, 3), 서양현대사(3, 3), 유럽지역사특강(3, 3), 세계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국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한국사상사(3, 3), 한국사특강(3, 3), 동양현대사(3, 3), 동양사특강(3, 3), 동양사상사(3, 3), 서양사연습(3, 3), 서양사특강(3, 3)

표 11 1997~2000년 역사과 개설교과목

전필 서양사교육강독(3, 3), 국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역사교육론(3, 3)
전선 한국고대사(3, 3), 한국사적해제(3, 3), 한국정치제도사(3, 3), 동양고대사(3, 3), 서양고대사(3, 3), 동양중세사(3, 3), 아시아지역사특강(3, 3), 한국중세사(3, 3), 서양중세사(3, 3), 한국사연습(3, 3), 한국근대사(3, 3), 동양근대사(3, 3), 역사와 역사교육(3, 3), 한국현대사(3, 3), 서양현대사(3, 3), 동양사연습(3, 3), 한국사회경제사(3, 3), 국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서양사상사(3, 3), 서양근대사(3, 3), 한국사특강(3, 3), 동양현대사(3, 3), 세계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동양사상사(3, 3), 동양사특강(3, 3), 한국사상사(3, 3), 서양사연습(3, 3), 서양사특강(3, 3)

표 12 2001~2005년 역사과 개설교과목

전필서양사교육강독(3, 3), 국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한국고대사(3, 3), 서양고대사(3, 3), 역사교육론(3, 3), 한국근세사(3, 3), 동양근대사(3, 3)
전선한국사적해제(3, 3), 한국정치제도사(3, 3), 한국근대사(3, 3), 동양고대사(3, 3), 동양중세사(3, 3), 아시아지역사특강(3, 3), 서양중세사(3, 3), 서양근대사(3, 3), 서양사학사(3, 3), 역사와 역사교육(3, 3), 한국중세사(3, 3), 한국사연습(3, 3), 한국사회경제사(3, 3), 한국현대사(3, 3), 동양사연습(3, 3), 서양현대사(3, 3), 세계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국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한국사상사(3, 3), 한국사특강(3, 3), 동양현대사(3, 3), 동양사특강(3, 3), 동양사상사(3, 3), 서양사연습(3, 3), 서양사특강(3, 3)

표 13 2006년 역사과 개설 교과목

전필서양사교육강독(3, 3), 국사교육강독(3, 3), 동양사교육강독(3, 3), 한국고대사(3, 3), 서양고대사(3, 3), 역사교육론(3, 3), 한국근세사(3, 3), 동양근대사(3, 3)
전선한국사적해제(3, 3), 한국정치제도사(3, 3), 한국근대사(3, 3), 동양중세사(3, 3), 아시아지역사특강(3, 3), 서양중세사(3, 3), 서양근대사(3, 3), 한국중세사(3, 3), 한국사연습(3, 3), 한국사회경제사(3, 3), 한국현대사(3, 3), 동양사연습(3, 3), 서양현대사(3, 3), 세계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국사교재연구 및 지도법(3, 3), 한국사상사(3, 3), 한국사특강(3, 3), 동양현대사(3, 3), 동양사특강(3, 3), 동양사상사(3, 3), 서양사연습(3, 3), 서양사특강(3, 3)

표 14 역사과 졸업생의 진출 현황과 분야

졸업년도인원 수대학 교육중등 교육일반 행정기타불명
1948612111
19491565013
195017040310
1951901314
19521133023
1953705011
1954613020
19552247335
19562858447
195738223337
195829415145
19591515216
196029612038
196124412224
196223270410
196323411026
196422116131
196527415035
19661121035
1967702014
1968914013
1969623001
1970814021
19711227012
19721135021
19731857312
19741744027
19751817325
19762497035
19771703473
19781515054
19791637114
19801656005
198129615017
19821656041
19832239541
198429412067
198524571110
1986391223310
1987352151017
198838227108
198929415127
1990301150113
199119050014
199223150017
199324150117
199425021121
199519250012
199626190412
199728021223
199825150316
199917020114
200024001320
2001250311110
2002280100711
200323040415
200426091412
20052209139
총  계1,20112644449140442
출전: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歷史科 同門會名簿』(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 동문회, 1982, 1989, 1997), 『會員名簿』(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창회)

   한편 역사과 졸업생의 진출 현황은 <표 14>와 같다. 역사과 총 졸업생은 2016년 8월말 현재 1,800여명에 달한다. 이 중 일부 졸업생은 오랫동안 현직 경험을 살려 교육전문직에서 종사하며 교육 행정의 개선과 교과 교육의 진흥에 매진하고 있다. 아울러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졸업생들은 중견 역사학자로서 학과의 학풍을 계승하여 역사교육, 국사, 동양사, 서양사 연구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1980년대의 교직 진출 증가는 교육계에도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이들 졸업생 중 상당수가 역사교육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공부 모임을 발전시켜 1988년 7월 전국역사교사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참여한 역사과 출신 교사들은 1988년 7월 15일 창립대회에서 “첫째, 교사들의 힘으로 올바른 역사교육 내용을 연구하고 역사교육 방법을 모색하여 실천해나간다. 둘째, 교육현장의 경험을 모아 서로 교류하면서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 보급한다. 셋째, 우리 역사 교사들이 모여서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공감대를 넓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사명감과 목적의식은 지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기능적 교사가 아니라 공부하는 교사, 실천하는 교사의 상을 직접 만들어가는 원천이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역사교사모임은 교육현장에 필요한 교수학습 자료집과 회지, 대안교과서를 제작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역사교육현장에서 살아있는 역사를 되살리고 있다. 한편 역사교육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2005년 3월 역사교육현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역사교과학을 정립하기 위해 한국역사교육학회를 창립하였다.
 
   이상 1945년 8.15 해방 이후 현재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가 걸어온 여정을 살펴보았다. 이 기간에 역사과는 우리 민족이 신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맞아야 했던 고난과 역경을 똑같이 마주하며 이를 헤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역사를 축으로 역사학과 역사교과에 정통한 사범을 배출하는 한편 이러한 사범들이 쉼없이 학문과 교육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우리 전통의 사범을 구현하는 동시에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범상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역사과가 창설 이래 지켜온 소중한 전통이었고 역사학계의 특색있는 학풍이었다. 그러나 역사과는 지나온 시간 만큼 앞으로 가야 갈 길이 멀다. 그 길은 현재보다 지난한 길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역사과는 이러한 도전에 굴하지 않고 진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발전 방향을 세우고 향후 진로를 전망한다.